위로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John 3:9–21

많은 사람들은 그 들만의 문화적 편견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경험과 문화의 바탕위에서 그럴꺼라는 가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색깔이 있는 유리안경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을꺼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1850년의 런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나쁜 공기가 병의 원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중세 이탈리아어로 나쁜 공기는 ‘mal-aria’ ` 말-아리아`입니다. 오늘날에는 세균때문에 병이 생긴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회가 심각한 쇠퇴를 맞고 있다고 믿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영국에서는 기독교가 오래된 신화의 하나이거나 비논리적이고 현대사회와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확실시 되고 있으며 기독교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망스럽게도, 사실 그들의 불만과 달리 기독교신자들은 다른 많은 나라에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문화적인 가정과 추측이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성경 속의 많은 사람들도 그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과 천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인들은 시간을 기차트랙과 같은 하나의 선으로 보았습니다. 시간이 시작되었고, 사건들은 순차적으로 일어납니다. 인생은 하나의 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선입니다. 천국은 미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 오실 것입니다. 목적과 과정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와 같은 수평적인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천국)은 위에 있는 것이고, 이 세상은 아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수직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의 세 복음서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으로 가정합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이러한 문화적 가정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요한도 히브리사람 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을 포함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예수님을 하늘(천국)에서 오신 분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13절에 그 예가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나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다.’

요한은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는 때인 미래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악한 시대가 끝이 나는 때로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에 완성될 것 입니다. 요한은 그 대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내려’ 보내주신 것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사고의 방식들을 물려받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촌이자 가장 가까웠던 제자였던 요한은 왜 이러한 그리스적인 세계관으로 성경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의 답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로는, 요한은 히브리적 사고 뿐 아니라 그리스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복음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요한복음이 에베소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요한복음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20장의 마지막절인 3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게 하고 또 여러분이 믿고 그 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속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성숙한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쓰여졌고, 당신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만약 다른 번역으로 이 것을 읽는다면, 아마도 히브리어의 원뜻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NIV 역에서는 이부분을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로 번역하고 있으며, King James 역에서는 ‘that ye might believ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NLT에서는 ‘that you may continue to believe’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믿게 하기 위함’ 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현재진행형 시제인 그리스어 문법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확한 번역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어의 의미로는 찾고 두드리는 것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NLT에서는 ‘계속해서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 20:13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과 요한복음 3:16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계속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예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믿음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현재의 계속되는 삶으로 반복됩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믿을 때 시작됩니다. 영원히 지속될 뿐 아니라 풍성합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을 계속 가진다면, 우리는 양적이고 또한 질적인 생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믿음을 멈춰버린다면, 우리는 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믿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요한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세는가 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85번에서 98번에 걸쳐 그의 복음서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히 많은 숫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보고 요한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그는 믿음이란 의미를 어떤 것이 진실일때 믿는 감각적 의미의 믿음이란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지난주에 서울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것을 믿는것과 같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죽으셨고 살아나셨다고 말하는것을 믿는의미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으로 맞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빙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생명을 주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야고보가 야고보서 2:19에서 언급했던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으니 잘하는 일입니다. 귀신들도 믿고 두려워서 떱니다.’

다음으로 그는 더 높은 수준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인 후에 우리는 우리의 신뢰를 그 진실 안에 둡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확신을 예수님 안에 둡니다. 나는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다는 것은 당신의 믿음 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렇습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나 제자가 됨으로써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런 방식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피상적인 믿음입니다.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는 ‘계속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번째 단계의 믿음입니다.

믿음과 충실함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는 같은 뜻의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단어가 뜻하는 것을 항상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신뢰한다면 당신은 계속 신뢰를 이어갈 것입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믿음을 갖는 다면 충실하고 신실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믿음의 단계에 오르는 시간 속의 한 순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도 아닙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그것은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믿음의 상태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4에서 예수님은 ‘내 안에서 살아라. 나도 너희 안에서 살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가지처럼 밖에 버려질 것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지는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동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살 때만이 생명을 갖습니다. 또는 요한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동안에만 생명을 갖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고,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 가운데 어떤 일들이 온다해도 그 믿음을 꼭 붙잡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복음서를 썼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예수님 자체를 믿는 그 믿음을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Amen 아멘

About Pastor Simon

Pastor at Jinju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Formerly of Eastbourne, East Sussex, UK. I am Simon Warner of Jinju Church. We speak English at Jinju Church,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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