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서 하나님 만나기

마태복음 17:14-21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산기슭에서 많은 군중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이 어떤 산이지 확실하게 알 방법은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헤르몬 산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근처에 위치하며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 (2,814 미터)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앞장은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에 계셨다고 말해줍니다.

오늘 날 헤르몬산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스키리조트가 있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그리고 두 형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이 산에 오르셨다고 말합니다. 사실 어떤 산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산위에 있는 동안에 그들은 가장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그 첫번째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그는 호렙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거대한 폭풍우와 지진 그리고 불을 경험했습니다. 열왕기상 19:12은 말합니다. “지진이 일어난 뒤에 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난 뒤에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내산과 호렙산은 같은 산입니다. 여러분은 신명기 5장 2절을 찾아보고 다른 번역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두 사람이 함께 이 산 꼭대기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그들은 한 번 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만남에는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이 만남은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그 둘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만남 또한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로서 사람들의 구원자임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함께 계실 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구름 속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만남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또 다른이미지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영적 거인인 두사람들과 함께 영광속에 높임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들 또한 빛이 나고 있으며 빛속에 잠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십니다. 그 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 또한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높임을 받을 것이고 그 분의 영광을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물른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것으로 곧 또 다른 산에서 일어날 또 다른 높이 들림입니다. 6일 전에 예수님께서 이것에 대해 세 제자들에게 말하셨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베드로는 큰 소리로 항변했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그는 말했습니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났고, 예수님은 산꼭대기에서 높이 들리셨습니다. 이번에는 로마 십자가에서 였습니다. 예수님 양 옆에 두 남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흉악범들이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모두 벗겨졌고 세상은 온통 어둠 뿐이였습니다. 이번에도 또한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받습니다. 이 산에는 영광 대신 오직 굴욕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두가지 높여지심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움과 치욕적인 것, 빛과 어둠, 파멸과 정당성, 성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과 죄인들에게 둘려싸여 있는 것, 빛을 입는 것과 어둠에 둘러 싸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빛과 기쁨속에 영광과 승리를 경험하고 산에서 내려와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산꼭대기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지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골짜기로 돌아와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 속에는 아들이 귀신들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제가 이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었는데,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17절에서 시작하는 말을 강하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약간 화가 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뒤틀어진 세대여!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그 아이를 내게 데리고 오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그 아이는 즉시 나았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따로 와서 물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귀신을 쫒아낼 수 없었습니까?”

“너희 믿음이 적어서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며,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쫒아내지 못한 이유가 그들의 믿음이 적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금으로 우상을 만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릴 정도로 오래 산 위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노골적으로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믿음이 부족합니다. 여기에 믿음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잡한 신학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은 말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얻게 되고, 말씀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그들은 우뚝 솟은 헤르몬 산을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겨자씨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보통 유대인들이 쓰는 비유-움직일 수 없는 산과 아주 작은 씨앗-를 들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하십니다.

만일 오늘 제가 이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만일 제자들처럼 제가 산에서 방금 내려 왔다면 저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작은 소년에게서 귀신을 쫒아 내기 원하신다고 제게 말하길 바랍니다. – 얼마나 강한 귀신일지 몰라도 말입니다.

마태복음 7:11에서 예수님은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에서의 저처럼, 그들은 단지 노력하려는 믿음을 가졌을 뿐 성공하려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봤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봤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12명의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능’ 을 주시고 그들을 보내신 것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그들은 그 일이 다시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은 산을 옮기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보다는 실날 같은 희망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분도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생각한다’ 고 말한다면 그것이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실패했을 때 예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귀신은 아이에게서 쫒겨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제 삶속에서 여러번 제가 믿음보다는 소망안에서 더 기도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행동을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처럼, 저도 당연히 초자연적인 삶과 믿음을 갖고 성장 하기를 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해결책보다는 오히려 변명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진실을 계속해서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탁하시는 것은 산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아주 작은 신뢰만 갖고 있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하라고 부탁하시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작은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 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그 일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론적이 이유들’로 할 수 없다고 변명을 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누군가가 치유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은 고치지 않으십니다’. 또는 ‘당신이 아픈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을 아프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치유하는 것이 ‘나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 문제를 무시하고 그 문제가 사라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대안적인 해결책들은 예수님의 삶이 모델이 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불가지론자들처럼 살 경향이 있으므로 주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이 삶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전에 우리가 놀라운 성인이 되야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 골짜기로 가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믿음을 가집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가장 크신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가장 작은 믿음만이 필요합니다.
Amen 아멘

About Pastor Simon

Pastor at Jinju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Formerly of Eastbourne, East Sussex, UK. I am Simon Warner of Jinju Church. We speak English at Jinju Church,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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