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주시는 정체성

Luke 5:1–11

여러분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체성은 여러 개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말하는 정체성은 여러분자신이 스스로를 보는 관점입니다. 자신에게 붙인 이름표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적이나 인종이 하나의 이름표가 될 수 있고,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반영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붙이는 이름표는 여러분이 스스로에 대해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자면, 이름 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고대 시대 한국에서는 중요한 사람들만이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중국에서 빌려왔습니다. 평민들이 한글 이름을 사용할 때, 양반들은 중요해보이는 이름을 한자와 섞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 김씨, 이씨, 박씨가 많은 이유입니다.

제 나라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직업, 주거지, 특징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한국의 ‘삼성맨’이라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영국에서 온 사이먼이라는 이름과같이 인종을 떠나 누군가의 아내, 아들, 아버지 등의 관계가 우리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많이 공부를 했는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어떻게 보이는가, 배우자가 어떻게 보이는가, 어떤 차를 운전하는가, 어디에 사는가 에 따라서 정의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서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 들의 소유물들, 사람들이 소유한 그 것들이 바로 그 들입니다.사람들이 가진 직업, 학위, 그 들이 가진가방, 혹 그 들의 아이들 만큼이 그 들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누가복음 5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의 진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무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다니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머물며 시몬의 장모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이적을 지켜보았습니다. 44절에 “그리고서 예수님은 계속 유대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돌아와 바닷가에서 설교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몬은 밤새 고기를 잡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정체성은 어부이자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칠 수 있도록 자신의 배를 내어주었습니다.

시몬은 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부이고 어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자이자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은 순종의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종교적인 문제에서 예수님을 신뢰할 수는 있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부분은 그의 전문분야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시몬은 이전에 서로를 잘 알았기때문에 즉석에서 찬성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몬이 순종한 이유는 명령하신 분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야고보와 요한)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우셧습니다.

그 순간 시몬은 자신이 어부일 뿐 아니라,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을 떠나달라고 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잘 아는 분야에 도전하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성공적인 정체성에 도전하실 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떤가요?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말하나요?

기드온이 하나남께 정체성 도전을 받았을 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사사기 6장을 살펴봅시다.

14절에 “그때 여호와께서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있는 힘을 다해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사람의 손에서 구출하라! 내가 너를 보낸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여호와여,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출할 수 있겠습니까?고 도전하며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예레미야 1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5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태에서 네 형태를 만들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구별하여 온 세상의 예언자로 세웠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는 아직도 어려서 말할 줄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자신의 나이를 이유로 들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어떻게 답했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도록 하겠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정체성이 단지 사막의 양치기가 아님을 설득하셨습니다. 이전의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정체성을 출생 전부터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몬과 같이 해야 합니다.

고기잡이 배가 바닷가에 닿자마자 시몬, 야고보,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큰 부자로 정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욥입니다. 욥은 고난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욥은 자신의 재산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욥은 그가 가진 돈, 관계, 사회적 위치, 가족이 하나님께 빌린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건강, 아이들, 명성, 역할, 부를 사랑했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거기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체성의 핵심을 보여주고 고통이 우리에게 기쁨의 원천을 바로 세운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슬프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면,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심을 고백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었는지 드러냅니다.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드러냅니다.

이 말의 뜻은 고난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내적인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우상들은 그렇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고통, 분노, 쓴 뿌리, 기쁨이 없는가운데 있다면, 이는 여러분이 그 어떤 단계에 있던지 기쁨을 잃어 버리고 우상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뜻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묵은 정체성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를 원하실 때,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기쁨을 향해 열린 문입니다.

복음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속에서 완전한기쁨을 제공합니다.

고통 가운데 기쁨을 잃고 쓴 뿌리가 생김으로 인해 우리가 무언가를 잃을 때 더욱더 단단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 보다 더 작은 그 어느 것이던지 안전이나, 가치. 의미를 둘 때, 그 것을 빼앗아가게 두실 만큼이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고통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당시에는 죽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자유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옛 정체성을 버리고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비하신 정체성을 취하십시오.

Amen 아멘

About Pastor Simon

Pastor at Jinju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Formerly of Eastbourne, East Sussex, UK. I am Simon Warner of Jinju Church. We speak English at Jinju Church, South Korea.
This entry was posted in Sermon - Korean and tagged , , , . Bookmark the permalink.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