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더 나은 길

마태복음5:27절~37절

예수님이 펼친 특별한 가르침을 우리는 살펴보고 있습니다. 소위 ‘산상 설교’이죠. 예수님께서 행한 대부분의 가르침의 비해 상당히 차이나는 것은, 비유담도 독백도 아니기 때문이죠.

이 설교는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3편의 집약된 계시이기에 우리가 되풀이 하여 되돌아 오는 것도 놀랄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도,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언덕 위에서 행해진 이 지혜로운 가르침에 깊이 감사합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살아갈 삶이죠.

여러분이 죽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는 아닙니다만 현재 어떻게 여러분들이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줄 수 있죠.

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 곧 태초의 이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의 개시 부분에서 예수님은 왜 메시아가 왔으며 메시아는 왜 로마 점령자들을 이스라엘에서 축출하지 않는지 간결히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목적이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죠. 그러니 율법은 명백히 목적을 갖고 있죠.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이유가 무언지 모른 채, 율법을 준 하나님의 목적을 모른 채, 맹목적으로 그 율법에 복종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복종하려는 사람들이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온갖 종류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죠. 예수님은 경고하기를 율법학자와 종교 고위층이 그 핵심을 놓치고 있기에 지옥을 향해 걷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은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얼마나 당시의 종교 지도층에게 모욕적인지 아시는지요? 그들의 얼굴을 향해 예수님은 ‘당신들이 잘못이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프란시스 찬이나 빌리 그레함, 조용기, 존 오트버그, 톰 라이트에 대해 정말로 감탄하는지요.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들보다 더 나아야만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완벽해져야만 합니다.

다른 길이 없으며, 대체 가능한 생활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완벽해야만 충분한 거죠.

예수님이 행한 산상의 설교는 참으로 ‘완벽해짐’에 관한 설교입니다.

완벽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선 한 예는 도덕성을 실천하기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순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도덕성은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순수한지요?

예수님은 이점에 있어 강한 태도를 취하죠. 도덕성은 선택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생활 양식에서 중심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일부가 여러분에게 부도덕한 행위를 부추길 경우에 육신의 그 부분을 잘라내는 아주 그림같이 생생한 본보기를 청중에게 또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남성 여러분, 반대 성性의 사람을 볼 때, 여러분은 명예롭지 못한 생각을 품으시나요? 그러면 여러분의 눈을 빼버리세요. 여러분 모두는 지금 두 눈을 가지고 계시니 이런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기괴한 형태의 자해 행위를 권유함으로써 예수님은 혹시나 여러분을 유혹할 지도 모르는 것들은 눈으로 보지도 말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실로 말하는 핵심은 행위가 아니라 그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간음하려고 생각했었나요? 그러면 이것은 이미 간음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도덕한 목적으로 주말에 교외에서 아내가 아닌 여인을 취하려고, 혹은 남편이 아닌 사내를 취하려고 생각했었나요? ‘괜찮아, 고루한 옛날 사람들이나 잘못이라 생각할 걸’하며 스스로를 설득하기 까지 했었나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죄를 범한 것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 목적이 우리 신체 부위를 잘라내어 비로소 우리가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 거죠. 목적은 이런 나쁜 일을 하려는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들이 나쁜 줄을 깨닫는 것, 회개하고 여러분이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죠. 젊은 여러분들 이렇게 하고 계신가요? 또 나이 드신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죄의식을 느끼시나요? 아니면 죄에 물들어 이런 혐오스런 생각을 도리어 부추기고 있나요.

예수님은 복수를 포기하라고 가르치죠. 우리를 속이거나 탄압하는 사람들에 갚음하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죠. ‘오른 뺨을 맞으면 왼쪽 마저 내주어라.’

오른 뺨에 가해진 따귀는손등으로 때리기 입니다. 이것은 거만한 고위층·권력있는 자가 멸시받는 열등한 사람에게 주는 모욕입니다. 상식적인 반응은 더 센 따귀로 되갚아주기 혹은 패자로서 슬그머니 사라지기 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정의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정의 대신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해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역습의 따귀를 돌려주면 여러분을 탄압하는 자와 같아지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면 여러분을 탄압하는 자가 이기는 거죠.

하늘 나라의 방식은 제 3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하죠, ‘다른 빰을 대주어라.’ 여러분의 앞에 있는 자가 자신의 손으로 이제 여러분을 한번 더 똑같이 때려야 함을 의미하죠. 여러분이 약하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용기있고 위엄있음을 보여준 셈이죠. 이 방식으로 여러분은 폭력없이 탄압을 초월할 수 있는거죠.

부유한 지주가 빚을 갚게 하려고 가난한 소작농을 법정에 데려가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지주가 여러분의 몸뚱이에 걸친 셔츠를 뺏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외투까지 내어주십시요. 여러분은 무방비로 벗은 몸이 노출되겠지만 이것이 실은 그들의 탐욕과 타락을 드러내는 데 이바지 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빚을 질 때마다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라는 가르침이 아니죠, 왜냐면 재판관이 간단하게 법정에서 탈의를 금하는 법을 제정할 것이기 때문이죠. 이는 악에 응답하는 하늘 나라의 방식을 찾으라는 가르침인거죠. 창조적일 것이며, 사랑할 것이며 변화하라는 요청인거죠

여러분께서, 군인의 배낭을 1마일 옮기도록 비천한 노역을 강요받거든, 할 수 있는 한 2배로 해주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은 자유롭게 그 일을 함으로써, 여러분을 탄압하는 자와 그 체제를 자유 의지와 관용을 통해 초월한 것이죠.

이것들은 구약성서의 계율들을 대체하기 위한 다른 계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율로 대체하려고 자신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죠.

이것들은 구약의 계율이 완성되었을 때의 생활 양식 내지 생활 관습, 생활 문화의 본보기인거죠

예수님이 ‘우리는 완벽해져야 한다’고 했을 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의중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려 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부분의 우리 일상에서 사용되는 완벽의 의미는 외적ᆞ기술적 면에서 완벽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항상 옳은 일을 하여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지금까지 예수님이 외적인 측정수단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한 항목에 대해 예수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고, 예수님이 제시한 이 특성이 산상 설교의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우리가 생각해도 될까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무언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이 명백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 더 높은 방식의 삶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친구를 사랑하기만으로 그치지 않죠.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합니다.하나님은 선한 사람들에게 선하고 사악한 사람들에게도 선합니다. 하나님의 완벽함은, 즉 우리에게 있어야만 한다고 전해 들은 그 완벽함이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일에 있어서의 완벽함입니다. 사랑의 완벽함이고 가슴 속 마음의 완벽함인거죠.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은 남과 북, 부자와 빈자, 우리와 저들, 형제와 원수 등의 낡은 구분을 초월하는 사랑의 가슴을 가진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말하고 있죠. 우리가 전래의 통념적 도덕성을 넘어서 이 급격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천에 옮겨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화해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완벽하게 살수 있다고 말이지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도록 부름을 받을 때 여러분은 이 새로운 양식의 생활이 가능하며, 필수적이며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되려면 예수님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의 바로 그 예수님을 믿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죠.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고 또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있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멘.

About Pastor Simon

Pastor at Jinju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Formerly of Eastbourne, East Sussex, UK. I am Simon Warner of Jinju Church. We speak English at Jinju Church,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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