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表迹과 기이奇異한 일

사도행전 2:14–41

여러분은 모두 저마다 스스로의 인식의 지평(패러다임)을 갖고 있습니다.
선택이나 여러분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어떤 지평을 갖게 됩니다. 얼굴에 코가 있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여러분이 가진 인식의 지평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여러분 자신의 잘못은 아니죠.
무너진 인식의 지평을 가진 것은 여러분이 작은 코를 가진 것이 여러분 스스로의 잘못이 아니듯이 전혀 여러분 자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큰 코를 가졌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인식의 지평이란 무엇일까요?
근데, 인식의 지평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들을 기회도 무슨 의미인지 알 필요도 없이 자신의 한 평생을 지낼 수 있는 그러한 어휘 가운데 한 낱말입니다.
인식의 지평을 간결히 말하면 이런 거죠. ‘여러분은 저마다 채색 렌즈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그녀는 장미빛 안경을 쓰고 있다.’ 그 의미는 심지어 그렇지 순간에도 매사를 경이롭게 바라본다는 거죠.
우리는 모든 순간에 렌즈를 착용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그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죠.
우리는 고린도 전서 13:12절로 부터 이에 관해 읽어 알죠.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 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식의 지평이 ‘세계관’, 혹은 ‘세상을 보는 방법’으로 달리 표현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시야는 흐릿하고 채색되어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죠.
여러분의 인식의 지평은 무너져 있고 여러분은 아마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
우리들 각자가 가진 인식의 지평은 정신 활동에 매우 본질적인 것이어서, 당신과 다른 인식의 지평을 가진 누군가와 의사소통해보기 전까지 저마다 가진 인 식의 지평의 존재를 거의 자각하지 못하죠.
이것이 예수님과 소통하려할 때에는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상이한 인식의 지평으로 인한 제약이 예수님의 언행을 이해하는 데 큰 장벽이 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같은 인식의 지평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여러분과 같은 인식의 지평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생존기의 그누구도 오늘날 여러분이 가진 인식의 지평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서로는 몹시도 다른 국가와 문화로 부터 왔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여러 인식의 지평들이 다르다 해도, 그 대부분은 17세기에 발전한 서구 세계의 시각에 뿌리를 두고 있죠.
심지어 동양적 인식의 지평을 가진 우리들조차 1세기 무렵 팔레스틴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이 사실은 우리가 우주에 대한 기계적인 관점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가령 커다란 시계로 비유할 수 있을 그런 우주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엽을 감아 뒀고 이후로 그 시계는 돌아가고 있는거죠. 혹은 하나님을 당구공이 가득한 스누커 테이블 앞에서 큐대로 흰 공을 가격하여 연속되는 충돌과 끝없는 움직임을 연출하고 있는 인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몸을 기울여 공을 궤도에서 벗어나도록 밀거나 시계추를 밀거나 톱니바퀴를 두드리거나 할 때,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자연의 질서를 통해 개입하는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곁에 서서 관찰하는 국외자로서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절대 몸을 숙여 장치를 수정하지 않으며 이 기계장치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연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시계와 스누커 당구공이 나오기 훨씬 전에 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인식의 지평은 훨씬 간명하고 원대했으며 더욱 유기적이면서도 덜 기계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밖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안에 갇혀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과 연결되어 있었고, 창조물에 임재해 있었고, 창조물의 안에 친밀하게 포함되어 있었죠.
우주는 하나의 가족에 혹은 하나의 공동체에 더 가까운 거죠.
예수님은 그 나라에 관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상의 왕국말이죠. 왕국은 왕이나 여왕이 있습니다.
통치자는 상호관계하에 그 나라에 참여합니다. 통치자는 현재하고 있으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며 열심입니다. 통치자는 한 부분의 이상의 무엇이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해보기로 하죠. 왕이 기계 장치를 만든 설계자로서 한발 물러서 있지 않은 경우를 말이죠.
왕은 자동차 운전자처럼 완벽한 통제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왕과 그 나라, 이 둘의 관계는 상호교섭하는 관계니다.
왕이 지시를 내릴 수도 있고 백성들이 이를 무시할 수도 있죠. 혹은 백성들은 왕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그 지시를 완수할 수도 있습니다. 왕은 법을 만들 수 있고 시민들은 이를 위반할 수 있으며 왕은 이에 응답할 수 있으 며 시민들은 이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기적, 복합적, 다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유대인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자유를 가질 여지를 주는 복합적인 인식의 지평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계 역시 있었습니다. 질서가 있고 그에 따른 여러가지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러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유를 빼앗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나라에 초대할 때, 그 나라는 그런 나라인 거죠.
하나님이 만들었던 것과 같은 진실된 원형의 나라인 거죠.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기이한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인식의 지평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세상이 병든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은 인간들이 자유를 남용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재물을 쌓고,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탐내고, 죽이고, 압박하고, 희생시키고, 이외에 수없는 사악한 짓을 합니다.
모든 남, 녀, 소년, 소녀가 이런 추악하고 고통스런 질병으로 인해 끔찍한 악영향을 받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은 표적과 기이한 일을 행表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 먼 이들을 보게 했고, 불구자들을 완치시켰고, 귀머거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고, 죽은 자를 일어서게 했고, 수없이 많죠.
이런 행적은 종종 ‘기적’이라 불리기도 하고 혹은 ‘표적과 기이한 일’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행적을 기적이라 부를 때, 우리는 잘못된 인식의 지평에 빠질 위험에 놓입니다.
이 행적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표적이며 기이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든 행적에 보이는 공통점 한 가지는 파괴적이기 보다는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과 벼락을 적들에게 내리기를 제안한 것만으로도 사도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적들은 신앙에 결부되어 있죠. 단순히 기계적인 연결이 아닙니다.
때로 표적은 신앙에 대表迹한 응답이자 동시에 신앙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주 “너의 신앙이 너를 낫게했다” 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하죠.
비록 예수님이, “그러니 너희는 내가 세상의 죄를 용서할 권능이 있을 알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말이죠.
표적과 기이한 일은 상징적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징표로서 사람을 치유합니다.
내적인 통찰을 주는 징후로서 시력을 부여합니다. 폭풍을 더 일으키든지 고요하게 하든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치유, 평화의 회복, 새로운 시작의 신호를 보내고 계신 거죠.
예수님은 대개 자신이 행한 표적과 기이한 일에 대해 떠들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일렀습니다.
표적과 기이한 일은 중요치 않았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표적과 기이한 일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갈구하는 거대한 군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한 가운데 이미 도래한 새로운 나라를 가르쳐 주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은 의료인이나 마술 쇼의 인기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나라를 가리키는 징후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고 경외와 기이함의 의미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이 전한 메세지의 참으로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비유담이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표적과 기이한 일들을 통해 행해졌습니다.
그 표적과 기이한 일들은 불가능한 것들이 이제는 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평화와 자유가 이제는 모든 이에게 허락됨을, 비정상적인 것들이 정상적이 되었음을, 죽은 자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었죠.
우리는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 삶의 일부로서, 관여하고 있고, 돌보고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늘 임재하여 계십니다.
그분은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의 엉망인 상황을 씻어내고 우리를 낫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기쁘게 맞이 하고, 그 왕과 하나님의 나라를 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부터 하나님께 우리의 사고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요청함으로써 시작합시다.

<– AMEN –>

About Pastor Simon

Pastor at Jinju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Formerly of Eastbourne, East Sussex, UK. I am Simon Warner of Jinju Church. We speak English at Jinju Church,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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