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이한 말이 아닌 비유담

마태복음 13:1–17

제대로 된 소통이란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의사 표현이 간결·명료하게 수행되는 근원입니다.
예를 들어.
“멈춰!“
“낭떠러지 너머로 질주할 거야.”
꽤 성공적입니다. 모호하지 않고도 간결합니다. ‘멈추시요’에 어서 부연되는 ‘짧은 설명’.
이 발화를 다음의 정중한 제안과 비교해 보죠.
“실례합니다만, 다음과 같은 저의 지적이 괜찮을런지,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당신의 현재 주행코스가, 그냥 두면, 지금은 당신의 운전으로 잘 달리는 이 차량이, 무엄할지도 모르겠으나, 절박한 위험의 순간에 직면하는 결과를 …
“우웁! 늦었습니다.”
또 하나의 의사 소통 방식은 유머를 통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은 농담으로 절벽 너머를 향해 질주하는 누군가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오직 명령어 2개만 알아듣는 말 한마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와 ‘예수님은 나의 주.’
였는데, 말을 전진시키려면 ‘하나님 감사하라’ 정지시키려면’예수님은 나의 주’라고 해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앞의 접근법에 근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공격에 즈음하여 종교지도자들을 뱀이라 일컬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벌을 피하라고 일러 주었느냐?
영국 국교회는 뒤의 접근법을 더 좋아하는데, 어떤 이에게 모욕적일 수 있는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째의 접근법을 가장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분은 비유담을 통해 뜻을 소통한 것이죠.
오늘의 성서 강독은 그 출전이 마태복음 13장에서 연속되는 비유담 중의 하나입니다.
13:34절로 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비유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들 중에서, 예를 들어13:9절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은 경청하고 있는 모두에게, 혹은 지금 자신이 말했던 것을 읽고 있는 분들 모두에게, 우리가 그저 우리의 귀로 들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들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 말씀만을 듣거나 표면적 가치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더 심원한 그 의미들을 더듬어 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위해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 시간, 정력, 상상을 투자해야 합니다.
축어적인 의미와 여러분의 합리적인 인식에 기인한 제약을 넘어서십시요.
각각의 비유는 숨겨진 무엇이 있어 나중에 그것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씨앗이 들에 뿌려집니다. 씨 안에 잠재력이 있어 씨앗은 식물이 되고 마침내 수천배 더 많은 씨앗의 수확을 거둡니다.
씨앗은 습기와 온기의 조화로 싹을 틔울 때까지 흙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압니다. 가라지는 처음에 감춰져 곡식같은 모습으로 은밀히 자라나죠.
흙 속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이지요. 수확기에만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겨자 씨를 압니다.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데, 놀라운 모습의 큰 식물이 되어 나타날 때까지 또한 흙 속에 감춰져 있죠.
효모가 있죠. 밀가루 반죽 속에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만 반죽이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은밀하고 신비롭게 비록 우리가 못보지만 변화를 일으킵니다.
보물이 있는데, 채굴지의 땅 속에 숨어 있죠. 값 나가는 진주가 있는데 그것은 발견되야만 했죠.
물고기는 수중에 있습니다. 그물에 포획될지라도 해안에 그물이 올려지기 전에 어떤 물고기인지 먹기에 좋은지 나쁜지 아무도 모르죠.
각각의 비유담은 뜻밖의 놀라움을 일으키는 반전이 있습니다.
청자로서는 올 것이라 聽者예상치 못했던 무엇이 있죠.
곡식이 되는 놀라운 변화.
잡초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
극미한 종자에서 놀라운 크기로 자라는 식물 등등.
문학의 한 양식으로서 비유는 일반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비유담에서 일정한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깊은 진리는 가려져 있죠.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내어, 파내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을 펼쳐 축어적 의미로 각 단어를 분석하려 한다면 결코 그 진리를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것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읽은 부분을 보시죠. 12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꺼낸 첫번째 비유를 듣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귀로 들었고 눈으로 보았으나 그들에게 그 진리는 숨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풀 수 없어 물음을 갖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묻는지요? 사도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느냐고 묻는 것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사도들은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죠. “이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거죠”라 물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나요?
그러나 사도들은 그러지 않죠. 그들은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요?” 라 하죠.
사도들이 기실은 ‘왜 당신께서는 이러시는지, 누구도 당신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합니다.’
고 묻는 거죠. 즉, ‘왜 당신은 의사소통 최상의 원리를 택하여 세례 요한처럼 바라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시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당신의 메세지를 분명히 알 겁니다.’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말하세요.‘
‘저희들을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여기서 우리는 중지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는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비유는 청자와 독자를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합니다.
비유란 어떤 유대감으로의 초대입니다.
무미 건조한 설명에서 이런 효용의 기대는 불가능이죠.
쉽고 명백한 설명을 하면 이해와 동시에 의미의 긴장에서 멀어져 청자는 독자적이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나라는은 우리의 독자성과 무관합니다.
천국은 우리의 상호 의존적임에 결부된 것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대감, 우리 서로 간의 유대감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유는 훨씬 더 많은 효과를 낳죠. 당혹스러움으로 혼란스럽게 하고, 의문을 갖도록 합니다.
비유는 화자로 하여금 話者유대감을 형성하고 유지하기를 요구합니다.
이때문에 어떤 이들은 참을성 없이 반응하여 넌더리를 내며 가버리거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화하고 간절한 사람은 더 알고자 하죠.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하는지 물을 때 무어라 답하나요?
다시 한번 예수님은 놀라운 권능을 보이십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천국의 비밀을 공유하기 때문이라 말하죠.
예수님은 이사야를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졌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겨 있다.”
냉정하고 굳어 버린 마음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이 무정해지면 명확히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죠.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려 했던 것은 단순히 정보만을 전달하려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영적인 개변과 수반되는 유대감의 조성입니다.
예수님은 듣는 이의 가슴을 두드리려 했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어린이의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학자의 태도가 아닌 거죠.
왜 예수님이 천국은 어린이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고 했는지 아시는지요.
어린이는 스스로의 무지함을 압니다. 어린이는 열성적으로 묻고 배웁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타인을 위주로 하며 의존적이죠.
유치한 이야기에 비해 만일 당신이 몹시 중요하고, 지식인의 학식을 원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의 율법학자나 대제사장 같이 종교적인 지도자라면 의미를 알고 화가 날 지도 모를 텐데, 어린이 같은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가슴이죠. 가슴은 절대 강제되지 않죠. 심지어 신에 의해서도 말이죠.
모두를 향해‘회개하라, 너희 용납되지 못할 죄인들아’하고 부르짖는 대신에, 예수님은 품위를 지키며 부드럽게 메세지를 나누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도 바보로 보이게 만들려 하지 않죠.
예수님은 지금 당장 여러분을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초대하려 하므로 예수님이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으십시요.
어떻게 응하느냐 결정할 자유는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과 앉아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의 마음의 유대를 맺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으시려는지요?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으시려는지요?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으시려는지요?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으시려는지요?

AMEN

About Pastor Simon

Pastor at Jinju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 Formerly of Eastbourne, East Sussex, UK. I am Simon Warner of Jinju Church. We speak English at Jinju Church,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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