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rning from the desert

1 Corinthians 10:1–13

Paul is writing to the Corinthians with a warning.

To illustrate the danger they are in, Paul reminds them of what happened to the Hebrews in the desert after God had rescued them from slavery. The Hebrews are a warning and an example of what not to do. Paul wants us to learn from them.

In Paul’s mind this is not some random example, the Hebrews in the desert are the ancestors of the Christians in Corinth. The link is direct and close. This is despite most of the Corinthian Christians being in fact Gentiles. Paul is using a story of a people chosen by God to teach another group of people who have been chosen by God. Even though you have been especially selected by God, you can still go badly astray.

If you do go badly astray, it won’t help that you are special to God and that he has given you all kinds of privileges. You will face destruction just like anyone else.

The two problems are the same for both groups. Porn and paganism. Immorality and idol worship. ‘Porno’ is the Greek word for immorality. Pornography is images of immorality. Don’t we struggle still today with these same two problems? So we also need to learn from the Christians in Corinth and the Hebrews in the desert.

Paul parallels salvation in the first exodus and salvation in Jesus to show that salvation does not prevent one from falling. He says one group was baptised into Moses, and we are baptised into Jesus. The Jewish people of the day were waiting for a new exodus led by a new Moses. They were waiting for the Messiah to lead them out of slavery and into heaven.

The Christians in Corinth seem to have been proud that they were saved. They seem to have thought that because they celebrated Holy Communion, as we did last week, that they were safe from all danger.

Paul pricks that bubble quickly. He notes that the Hebrews passed through the Red Sea in a form of baptism. That they ate sacred manna and water given by God. In verse five he says: “Yet God was not pleased with most of them, and their bodies were scattered in the wilderness.”

Taking part in the Lord’s Supper does not protect us from this danger. We are warned that if we open ourselves up to porn or paganism, we will be destroyed. You are not protected.

Do you remember who it was who told Eve in the Garden of Eden that if she ate the fruit she would not die? Of course, it was Satan. He is still telling the same lie to anyone who will listen.

Many of God’s chosen people were destroyed. In verse eight we are reminded how 23,000 died in one day because they indulged in porn. Don’t be like them, Paul urges the Corinthians.

Paul says the Hebrews craved evil things. We must not crave evil things.

What are some of their evil cravings? We can find the answer in Numbers 11. They complained and wanted better food than the sacred manna that God had given them. Instead of God’s spiritual food, they wanted meat. Just as they had once eaten in God’s presence, verse seven says they began to eat with idols.

The Corinthians had the bread of life, the living manna that is Jesus. They had the true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They craved more. They attended pagan feasts. They engaged in immoral actions. They lusted after flesh.

Be warned, if you entertain evil ideas you will also face destruction.

Verse nine, don’t put Christ to the test. Penalty, death from snakebites.

Verse ten, don’t grumble. Penalty, death by a visit from the angel of death. The angel of death is the angel who visited every home in Egypt, passing over those homes marked by passover blood, and killing every first-born child.

Verse eleven. These things “were written down to warn us who live at the end of the age.”

The Corinthians were in as much danger as the Hebrews in the desert. Do you think you are safe? No, this warning is for us to. We also are in grave danger.

Verse thirteen makes it clear. “The temptations in your life are no different from what others experience.” The Hebrews, the Corinthians, and us, we all have the same temptations. Your temptations are not special, different or unique. The penalty if you give in is no different either.

Paul also tells us that God ‘will not allow the temptation to be more than you can stand.’ There is no excuse for giving in. You can never blame the temptation and say it was too much. Scripture takes that excuse away right here. We cannot say that Satan made us do it.

That is what Eve tried to do in the Garden of Eden, but God rejected that excuse. He made her take the responsibility along with Adam.

Satan holds up the apple in front of you, but the evil desire to eat the apple comes from inside you. Satan doesn’t force anyone to eat the apple. You may then say that you were dying of hunger and you weren’t strong enough to resist.

The Bible says that is not true. It says you are always strong enough to resist. No excuses. The devil didn’t make you do it. You did it because you wanted to. The devil provided the opportunity. The devil reminded you.

In verse four, Paul says all of the Hebrews drank from the same spiritual rock that travelled with them. He is linking the water from the rock to Jesus or to God. He is saying that at all times in the desert God was with his people and giving them life.

Jewish myths say that the actual rock moved around the desert, but other sources say only that at every stop in the desert God miraculously supplied water. Marah, Massah and Meribah were only three among many.

God does not and cannot tempt. God blesses. He gives spiritual food and drink. He is patient.

He doesn’t allow any greater temptation than you can bear. If you are tempted, it means you can endure it and grow. God has promised. If you don’t endure, it isn’t God’s fault. It’s yours.

Do you have porn in your life, then you are experiencing the normal temptations all of us have experienced since the Hebrews wandered in the desert. That isn’t an excuse. It will kill you just as it killed them.

Do you have idols in your life? Could you have false gods? Superstition maybe. Your smart phone perhaps. Your looks or your intelligence, your education or your career, your marriage or your children. That’s been normal since the Hebrews were rescued by God from Egypt. It got them killed and it will get you killed.

What should we do any time immorality or idols creep into our lives? God says we have the strength to resist them. And Paul suggests the best thing is to turn away from them. Turn the other way. Don’t look. Don’t touch. Put down that magazine. Turn off that video. Stop playing that game. Always be alert and careful.

Verse twelve: “If you think you are standing strong, be careful.”

Paul says the easiest way to deal with temptation is to run away. You see something, and you feel the temptation rising inside you, then look away. Run away. Flee. Because this is a warning sign to you that you are in imminent danger of death.

The best protection is to run away. Compromise will kill you. You will die if you entertain evil desires. Don’t entertain them. Turn to God.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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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과 열매

갈라디아서 5:16–26

사과 나무를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가 최근에 읽었던 방법인데요, 하나의 나무와 20킬로그램 나가는 스무 박스의 사과만 있으면 됩니다. 모두 400킬로그램의 나무가 되겠죠. 어떤 종류이든 상관없이 나무는 충분히 크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많은 줄이 필요합니다. 이제 각각의 사과를 나무의 가지에 하나 씩 묶으면 됩니다. 만약 여러분 이ㅡ 사과가 중간 크기 라면, 2500개 남짓한 사과를 달 수 있을 거에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여러분은 사과로 뒤덮인 한 나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방금 사과 나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사과 나무를 방금 만들어 낸 건가요? 아니죠. 그것은 착각이지요. 사과 나무 인것 처럼 보이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일’이지요. 정말로 쓸모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사과를 박스에 두고 저장해두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이 나무는 멀리서 보 았을때 사과 나무처럼 보일 뿐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진짜 사과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사과나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로 과실을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대로, 우리가 어떤 크리스챤 인지를 스스로 자문하고 생각해 봅시다. 행함이 있는 크리스챤 으로서 우리는 죽은 가지에 과일을 놓고, 그런 척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행함이 없어도 참된 그리스도인 으로써 열매가 절로 맺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희가 읽었던 본문 19절에서는 ‘일 혹은 행함’이 나오고, 22절에서는 ‘열매’가 나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일’의 목록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적 부도덕성, 불순, 욕정, 우상숭배, 마법, 적대감, 다툼, 질투, 화를 못참음, 이기적인 야망, 불화, 당 짓는 것, 시기심, 술 취함, 난잡한 파티, 그리고 이와 같은 다른 죄들.”

바울은 또한 우리에게 열매의 목록 또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충성, 상냥함, 그리고 자기 절제.”

분명, 그는 이 두 가지 목록을 목적을 가지고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그 모든 ‘일’들은 나쁘고, 열매 들은 좋은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열매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반응으로부터 우리의 가지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상태에 대한 외적인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한 사과나무라면, 우리의 열매는 사과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에게 바울이 말했던 목록들에 따른 열매 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께서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사실은 사악한 늑대이면서 마치 순한 양처럼 위장하고 다가오는 것을 주의하라. 너희들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들을 구별할 수 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된 것처럼 느낀 적 이 있습니까? 열매가 없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느낄 때는 우리는 종종 우리 마음속에서 오는 성령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시도할 때 입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으로 대하고, 귀찮게 대하는 친지들 에게도 친절하고, 정부에도 충성스럽게 봉사할 것이라고(비록 우리 자신이 그것에 대해 불평할지라도) 결정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을 더 열심히 할 것이라고, 더 훈련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재 생산 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로 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한번 들어 봅시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다른 모든 사도들 보다 더 열심히 일 하였노라.”

분명 바울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일’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 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이유로,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 할 때 그것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일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 할때 그것은 ‘열매’ 로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삶을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스스로 훈련된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 바울의 목록에서 ‘당 짓는 것’ 같은 태도에서 그들은 덜 성공적인 사람들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기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덜 성공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해 왔던 것을 본받아 해야 하고, 자신들처럼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하지만 실패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기심과 질투를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화를 내기도 합니다. 바울의 목록에서 제시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판단과 절망 역시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망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일 수 있지? 나는 그리스도인 로써 실패작이야.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쓰일 수 있겠어? 모든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것 같아.’라는 말들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것들은 겸손한 영혼에서 오는 생각들이 아니라, 독선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 없음과 약함에 대해 제가 놀라야 할까요? 내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잘못된 믿음은 나의 완전한 무능함을 성령의 역사와 따로 떨어져 생각한다는 것에 놀라야 합다. 절망은 단지 독선에서 온 판단의 하나 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의 이전 장에서 바울 은 이것의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으나, 아브라함은 일과 열매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아이를 만들려고 하였다. 갈라디아 4장 23절에서는:

“The son of the slave wife was born in a human attempt to bring about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 But the son of the freeborn wife was born as God’s own fulfillment of his promise.”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해 인간의 노력으로 시도하여 노예의 부인의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자유한 부인의 아들은 하나님의 그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로 태어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성취하여야 한다는 책임을 가지기로 결심 했습니다다. 그것은 ‘일’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 사고방식의 다른 예는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낳았을 때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예배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 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 인내, 친절함, 사랑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바울 이 언급하였던 선한 목록들입니다. 우리는 기뻐하지만, 우리 자신의 의로움으로 인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은 우리 안에서 절로 생겨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쓰고 있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대하기를 계속 할 뿐입니다. 예배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모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와서 주님을 바라보세요. 저 또한 잃었었지만, 지금은 찾은 바 되었습니다. 저는 눈 멀었었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한 판단의 상처가 예배 하는 얼굴의 빛을 망칠 수 없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가 실패를 직면할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가 절망적인 생각과 마음속에 초점을 두는 것을 막으십니다. 대신,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함께 가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예수님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슬퍼하고, 우리의 구원 안에 더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들은 그의 희생 속에 녹아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과감하게 은혜의 왕좌로 나아가서, 자비를 구하고 은혜가 우리의 필요를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열매는 오직 예수님안 에서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5:4-5) 나뭇 가지에 과일을 달리게 하려고 우리가 수고를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그가 그저 주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열망을 만드셨고, 성령 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와 함께 흐르는 우리의 아름다운 열매 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좋은 열매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마음 에서 부터 흐르는 사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 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신뢰하시겠습니까? 여전히 우리가 의로움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직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성공적이라는 것에 맞추어 살아야 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하기에는 너무 어려워 보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해나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를 나무에 사과를 매다는데 에너지를 다 쓰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에너지를 주님께 맞추어 성령의 열매가 절로 맺히도록 주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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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uit not Works

Galatians 5:16–26

Have you ever wondered how to make an apple tree? You could try this method that I recently read about. All it needs is one tree and 20 boxes of apples that weigh 20 kilograms (42 pounds) each. That’s a total of 400 kilograms (840 pounds) of apples. Any kind of tree will do as long as it is large enough.

You will also need a lot of string. Now tie each apple on to the branches of the tree one at a time. If your apples are medium sized, you will have a few more than 2,500 apples. It might take a while, but when you are done with your hard work you will have a tree covered with apples. Congratulations, you have just made an apple tree.

Have you really just made an apple tree? No! It is an illusion. It is a pretend apple tree.

This is works. It is really rather useless. It would have been better to leave the apples in the boxes and store them. It only looks like an apple tree from a distance. When you get up close you can see it isn’t.

A real apple tree doesn’t need you to do anything. It will bear fruit by itself.

In our reading this morning we are being asked to think about which kind of Christian we are. Are we a works Christian, hanging fruit on dead branches and pretending. Are we a fruits Christian without doing any work.

In Verse 19 of our reading this morning we have ‘works’. In verse 22 we have ‘fruit’.

Paul gives us a list of works: “sexual immorality, impurity, lustful pleasures, idolatry, sorcery, hostility, quarreling, jealousy, outbursts of anger, selfish ambition, dissension, division, envy, drunkenness, wild parties, and other sins like these.”

Paul also gives us a list of fruit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Obviously he makes these two lists for the purposes of comparison. He wants to make it clear to us all that works are bad and fruit are good. The fruit appears on our branches in response to the life within us. It is the external evidence of our internal state. If we are truly an apple tree, our fruit will be apples. If we are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our fruit will accord with Paul’s list.

This is why Jesus was able to say in Matthew 7:15, “Beware of false prophets who come disguised as harmless sheep but are really vicious wolves. You can identify them by their fruit, that is, by the way they act.”

Jesus say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Do you ever feel like a barren tree? No fruit. When we feel like that we often attempt to achieve in our own strength what is not growing in our hearts. We determine that we will act lovingly to that unlovable person, be kind to that annoying relative, or faithfully serve in that ministry (while grumbling to ourselves about it). We say to ourselves that we will work harder, be more disciplined, and pick ourselves up by our proverbial bootstraps and get on with it.

We try to reproduce the fruits of the spirit by works. It doesn’t work.

Now lest we think we should never work at anything ever, and it is God’s will that we should lie around all day doing nothing, listen to Paul again. He writes to the Corinthians: “I have worked hard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Clearly Paul thinks hard work is good. Hard work and works are not the same.

Paul explains: “yet it was not I but God who was working through me by his grace.” It is the work of God’s grace by his spirit in us.

It is works when you are doing it in your own strength for your own reasons. It is fruit when it appears naturally as you work hard for God at the work he has given you.

A person who has worked really hard in there life and been self-disciplined may find they are successful. What often happens to them is that they look at less successful people with an attitude of things from Paul’s list such as ‘division’. These people have ‘selfish ambition’. They feel that the less successful person should do what they have done and just work harder.

At other times we work really hard and fail. We feel envy and jealousy, we have outbursts of anger. More things from Paul’s list. It is all works. It is all born from sin. Judgement and despair are both wrong.

Have you ever known despair. Have you aver said to yourself, ‘How can it be that I’m such a horrible person? I’m a failure of a Christian. What use am I for the kingdom? Everyone is better than me.’

These are not the thoughts of a humble soul, but a self-righteous one. Should I be surprised at my own inabilities or weaknesses? My false belief that I’m not really that bad is shocked by my complete inability to change apart from the Spirit’s work. Despair is simply the other side of judgement in the currency of self-righteousness.

In the previous chapter of Galatians Paul gave an example of this. He mentions Abraham and his wife Sarah.

God told him Sarah would give him a child, but Abraham tried to make his own child because he did not understand the difference between works and fruit. Galatians 4:23 says:

“The son of the slave wife was born in a human attempt to bring about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 But the son of the freeborn wife was born as God’s own fulfillment of his promise.”
Abraham and Sarah decided to take responsibility for fulfilling the promise given by God into her own hands. That is the works mentality. Another aspect of this mentality was how Hagar became proud when she gave birth to Abraham’s child.

The work of the Spirit always overflows in worship.

It’s then we find ourselves living lives of obedience to God. We discover that we are showing joy and patience, kindness and love, and our hearts abound with thanksgiving. These are things from Paul’s good list. We rejoice, but not in our own righteousness. We rejoice in the work of the Spirit within us.

There is no judgement for others, because we recognize all our works are simply a gift born within us. We don’t look down on others who are struggling; we just keep inviting them to Jesus. With a heart of worship, we say to all: Come behold the King! I was lost, but now I’m found. I was blind, but now I see.

The scar of prideful judgement does not spoil the glow of a worshipping countenance.

In a similar way, when faced with our failures, the Spirit prevents us from despairing thoughts and inward focus. Instead, we repent and turn again to Christ in worship.

Rather than become paralysed by our sin, we behold the work of Jesus in new ways. We mourn our sin, and we rejoice all the more in our Saviour. All our failures are absorbed in his sacrifice. With confidence, we boldly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finding mercy a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This type of fruit is only born by abiding in Jesus (John 15:4-5). There’s no need to spend our labours tying fruit onto tree branches. What we long for, he freely gives. He shapes our longing by his spirit at work within us, and we overflow in worship and bear the beauty of our Creator.

Good fruit proceeds out of a mouth which overflows with love flowing from a heart filled with love for others.

The issue today is whether or not God will transform us from sinners into saints.

Will we trust him to work out his fruit in our lives. Do we think we have to work to produce works of righteousness?

Will we pursue our Christian life based on doing what we think will be successful, or will we trust God to do something that we see is too hard to do?

Will you spend all your energy tying apples on your tree, or will you trust God to bring forth spiritual fruit as you focus all of your energy on him?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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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선교사

Acts 13:44–52

1988년 6월 10일 새벽 서울 강남구 성모 병원에서, 제 아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 이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볼 수 없는 문 뒤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는 문을 부수고 그녀를 구출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아내가 저렇게 비명을 크게 지른다면 아마도 죽지는 않을 꺼 라고 자신에게 반박햇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녀를 보살피는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 아내를 도우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껴졌습니다. 나는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8 시경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비명을 멈추고 얼굴에 번지는 놀라운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기적이 일어 나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아내가 아들을 보자, 그녀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영원히 바뀌었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이것은 엄청난 일 이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굉장했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영광에 대해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대신에 나는 장모님께 이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부모님께도 말했어야 했습니다. 첫 손자가 태어났다고.

역시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소식은 가능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몇 몇 친한 친구에게 말했으며 나는 한국 전체가 알 수 있도록 ‘코리아 헤럴드’ 신문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매우 기뻤으며 좋은 소식을 나누어야 만했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위대하고 신나는 좋은 소식이 훨씬 좋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신이 나서 이 좋은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생활이라고 생각하여 전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들은 종교는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 의 기분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스며들었습니다.

그 들은 저녁 파티나 고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정치와 종교 그리고 돈에 대해서 결코 논의해서는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한 영국인은 저입니다.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찾은 남자와 여자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한 영국인이 110년 전에 진주에 왔습니다. 그는 복음이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휴 커렐 박사님께서 진주에 오셔서 이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일을 기념하여 축하합니다. 그는 진주교회를 세웠습니다. 휴 커렐 선교사님 덕분에,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모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을 들음에 대한 바른 응답이라고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밝힙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그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읽어보세요.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up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telling people about me everywhere—in Jerusalem, throughout Judea, in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그러나 당신은 성령님이 당신에게 올 때 권세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에서, 사마리아에서, 땅끝까지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말하는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의목적은 전세계를 다니며 예수님에 대해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휴 커렐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갔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만약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선교사들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선교사들은 외국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잘못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모든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동안,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가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12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72명의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예슈님은 가고 말하는 전례자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은 양에게 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요한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당신이 보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가서 제자를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19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말했습니다.

휴 커렐은 이 말에 순종하여 영국에서, 호주로 가서 호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진주로 왔습니다. 진주에 있는 모든 개신교 교회들의 뿌리는 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 첫 개신교 선교사는 웨일즈사람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입니다. 그는 1865년 9월 13일에 도착했습니다. 복음이 훨씬 일찍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첫 기독교가 1603년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 한국인 외교관에게 들어왔습니다. 1758년에 천주교 선교사들은 받아졌으나 기독교는 금지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1785년에 또 소개 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수 가 급증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가 도착하기 2년 전, 한국 정부는 외국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1863년에 8000명의 기독교인들을 처형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로버트 토마스는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곧 죽었습니다. 다음 해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도착하자 마자 성경책 들을 팔에 움겨 쥔 채 죽음을 당했습니다.

18년 후 오랜 기다림 끝에 한국은 마침내 바깥 세상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호레스 엘른은 1884년에 선교사로 도착하였습니다, 21년 후 1905년에 휴 커렐이 진주에 도착할 수 있는 첫 꾸준한 흐름이었습니다.

많은 피가 흘려졌고 한국에 복음을 전하 려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육과 의료를 가져왔습니다.

지금 복음을 들은 많은 한국인들은 그것을 전하기 위해 세계로 갑니다.

왜 그들은 가는가? 그 들은 첫 선교사들이 오셨던 그와 똑 같은 이유로 갔습니다. 그 들은 우리가 가는 이유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the Lord gave us this command when he said, ‘I have made you a light to the Gentiles, to bring salvation to the farthest corners of the earth.’”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47절에서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또한 우리는 이 복음으로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전해야만 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 하여 앞으로 가려고 할 때, 교회의 미션 작업에 대한 기준을 세웠습니다.지역의 믿음의 지체들 –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 뒤에 남겨진 사람들 –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 와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라고 말해왔습니다. 인류의 영적 상태를 보십시오. 로마서 1장 21절~32절은 죄악스러운 세상을 묘사합니다. 죄는 사람들을 타락한 행위와 무엇이 옳은지 인지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을 향해 미끄러지게 합니다. 모든 믿지 않는 사람은 어둠속으로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데 고통 속에서 울부 짖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들 에게 하나님의 영적 공급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은혜로 인류의 신뢰에 대해 응답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외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했습니다 – 살고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까지. 구원의 제안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어느 곳에 서나 사람들은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은 멀리 그리고 빠르게 전달됩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가지고 씨앗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성장 할 지에 대한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휴 케럴 선교사는 진주 에서의 희생 적인 일 이 110년 후 우리가 있는 오늘 모든 교회로 이끌게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예배이고 증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보낼 것이지만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마태 복음 28장 19절에 진술된 명령입니다.

하나님 의지 안에서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선교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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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명령으로

Psalm 33:1–22

그 분이 예수님이기 전에 누가 예수님이었습니까? 이상한 질문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천사가 요셉에게 아들은 가지게 될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천사는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그는 누구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었냐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창조 전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었다고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33편은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Lord merely spoke,
and the heavens were created.
He breathed the word,
and all the stars were born.
여호와의 명령으로 하늘이 만들어졌으며 그의 말씀으로 수많은 별들이 생겨났다.

이 시편구절은 창세기에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자 그곳에 빛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설명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In the beginning the Word already existe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그분이 예수님이기 전에 누가 예수님이셨습니까? 그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은 아주 쉽게 넘어가거나 집중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잠시 멈춰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한 ‘말’에 대해 마음속으로 상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냥 말하는 것으로, 그냥 한마디 내뱉는 것으로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주 가볍게, 아주 즉석적으로 생겨난것 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말한 이 말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실제 그리스어로 ‘logos’입니다. 히브리어로는 ‘dâbâr’입니다. 그는 예수님이기전에 그는 Logos였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logos(말씀)가 그리스의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말씀되신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So the Word became human and made his home among us.”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Logos라고 말하면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그는 그것을 다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의 모든 말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헤라클레이토스라고 불리는 사람이있었습니다. 그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썼던 에베소에 600년 전쯤 살았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과학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왜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살피며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헬라클레이토스는 과학적 조사를 발명했습니다. 그는 법과 논리를 추구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사용했었던 말’ 왜일까’가 Logos입니다. 그는 ‘모든 독립체는 이Logos와 일치함으로 형성됩니다.’는수수께끼 발언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가 삶을 인식할 때 그는 Logos를 찾았습니다. 그가 날씨에 대해 조사 할 때 그는Logos를 찾았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항상 어떤 숨겨진 그 이유를 생각했고 그는 이것을 Logos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생물학, 또는 사회학, 또는 지질학이라고 각기 다른 영역의 학문을 칭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보다시피, 에베소에서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쓸 때 Logos는 간단한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Logos라고 말했으며 예수님이 모든 일어났던 현상의 궁극적인’이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후 몇백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 유명한 대학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유대인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히브리와 그리스 사상 결합하는 것을 잘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이되었습니다.

필로는 번역에 참여한 한명의 교수였습니다. 필로 교수는 Logos는 ‘그것’ 이 아니고 항상 ‘그’라고 말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필로는 잠언에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과 같은 아주 유사한 방법으로 Logos를 의인화했습니다.

요한은 이 두가지 이해와 결합을 취합니다. Logos는 모든것의 뿌리인 그냥’왜일까’가 아니라 Logos는 한명의 인격입니다. Logos는 그냥 인격이 아니라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logos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 이전에 존재했습니다. 그 후에Logos는 육체를 가지고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이 예수님입니다.

애초에 Logos는 하나님이 한 쌍의 개념을 창조한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의도적인 양극입니다. –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그러나 선과 악이 아닌.

예수님안에서 하늘과 땅이 결합 할 때,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물인 남성과 여성을 재확인하고 모든 창조물에 대한 영광스러운 목적은 베일을 벗게됩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 오셨으며 신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그 자신이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Logos는 하나님 그 자신이 세상으로 온 것입니다. 그 완벽한 사람에 대한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 완벽한 사람에 대한 실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요한이 기록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도덕적 원칙들이거나 여러분의 실체를 찾아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괜찮다고 하는데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Logos는 우리가 반드시 판단해야하는 것에 대한 반대 기준입니다. 우리가 logos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속으로 들어온 logos의도착은 심판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그는 사랑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걸어오셨으며 우리에게 우리가 괜찮지 않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변화의 방향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것은 logos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랑밖에서 살수있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명확하며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가 육체의 옷을 입었을 때 logos처럼 보인다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행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하며 logos또한 우리의 삶의 모범이 되어야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살펴본 logos는 아이들을 만드는 하나님의 청사진 같습니다. 어쩌면 DNA 처럼. 그가 그의 형상대로 그의 아이들을 만들었을 때 그 형상은 logos였습니다. 그 청사진은 우리가 창조된 그 순간 우리에게 각인인되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청사진을 조절하는 동안 우리는 어떤 진정한 만족도 가질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우리 삶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동안 우리는 결코 완벽한 평화나기쁨을 알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더러운 것과 사탄으로 부패한 우리를 정화합니다. 그는 logos 로써가 아닌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깨끗게 하시며 logos로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는 logos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기전에 그는 logos 였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과 살기 위해 우리가 모두 창조한된 그 곳에서 그와 하나가 될 것 입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그 완벽한 도시 새 예루살렘에서.

Logos는 그냥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를 돕습니다.

Logos는 예수님입니다. Logos는 여러분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입니다. 그 logos가 무엇인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심판하는 그리고 세상을 구하는 말씀이며, 그 말씀은 지금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감성적으로 다루지 마십시오; 말씀안에서 배우세요.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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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merely spoke

Psalm 33:1–22

Who was Jesus before he was Jesus? Does that sound like a peculiar question?

When an angel told Joseph he was going to have a son, he was told to name his son Jesus. But we believe Jesus existed before he was born. Who was he then? It is similar to the question, What existed before God created the universe? The Bible answers this question. It tells us that the Word existed with God before creation. It tells us Jesus is the Word.

Psalm 33 poetically says:

The Lord merely spoke,
and the heavens were created.
He breathed the word,
and all the stars were born.

Here in this Psalm we are reminded of what it says in Genesis. God spoke, and there was light.

The Gospel of John opens with this explanation:

“In the beginning the Word already existe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Who was Jesus before he was Jesus? He was the Word.

Here is where we need to pause. It is too easy to skip on by and not pay much attention. We might have a mental image of God saying a ‘word’. We might be impressed that he can create a universe just by speaking, just by breathing a word. It sounds so gentle, so casual.

What is this word that God speaks?

The word is actually ‘logos’ in Greek. In Hebrew it is ‘dâbâr’. Before he was Jesus, he was Logos. Most of us know that logos is Greek for word. We also know that in Jesus the Word became a person (John 1:14).

“So the Word became human and made his home among us.”

John opens his Gospel by telling us that Jesus is the Logos. We have to remember this as we read the Gospel, because he doesn’t say it again. It is, however, behind all he says.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man named Heraclitus. He lived in Ephesus, where John was writing his Gospel, about 600 years earlier. Heraclitus was the founder of science. He taught that man needs to probe and learn about the world by asking ‘the reason why’. Heraclitus invented scientific enquiry. He looked for laws and logic. The word that Heraclitus used for ‘the reason why’ was Logos. He was famous for the cryptic utterance that ‘all entities come to be in accordance with this Logos.’

When he looked at life, he looked for the Logos. When he studied weather, he looked for the Logos. Heraclitus always sought the reason behind what took place, and he called this Logos.

That is why we call the study of different areas of science biology, or sociology, or geology.

So you see, in Ephesus when John was writing his Gospel the word Logos didn’t simply mean ‘word’. To say Jesus was the Logos was to say Jesus was the ultimate ‘reason why’ everything happened.

But there is more.

There was, a few hundred years after Heraclitus, a famous university in the city of Alexandria in Egypt. Because of the large number of Jewish scholars in the city it was particularly skilled at combining Greek and Hebrew thinking. This is where the Old Testament was translated into Greek.

Philo was one of the professors involved in the translation. Professor Philo insisted that the word Logos was not ‘it’, but should always be spoken of as ‘he’. Philo personified Logos in much the same way that Proverbs personified wisdom as a woman.

John takes these two understandings and combines them. Logos is not just ‘the reason why’ at the root of everything, Logos is a person. Logos is not just any person, but he is Jesus.

God had a reason for creating the universe. That reason is Logos. The reason existed before God began to create. Later on, the Logos took on flesh and became a person. The name given to that person is Jesus.

In the beginning the Logos was the reason that God created pairs. God’s creation is deliberately bipolar – heaven and earth, man and woman. But not good and evil.

When heaven and earth are joined together in Jesus, the glorious intention for the whole creation is unveiled, reaffirming the creation of male and female in God’s image. Jesus has come as the Bridegroom, the one for whom the Bride has been waiting. John says we are the Bride of Christ. Jesus came for us, to unite us with himself.

The Logos is God himself come into the world. The ideal of the perfect human has become the reality of the perfect human in Jesus.

The Bible is not the word of God in this sense. Jesus is the word of God.

Understanding this is vital to understanding all that John writes. Jesus is not about moral principles or finding out who you really are. There is no comfort that you are OK.

Jesus shows us that we are wrong. The Logos is the standard against which we must be measured. As soon as we look at the Logos we see how far we are fallen.

The arrival of the Logos into this world brought judgement. Of course he also brought love. He walked among us and showed us that we are not OK. We need to be changed. He offers us the way to be changed.

We too were made in the image of God. What is the reason for our suffering? It is the Logos.

We were not created to live without a relationship of love with our creator. The Bible is clear, and Jesus clearly shows us what the Logos looks like when he is clothed in flesh. He is love and he does what he sees God do. He is one with God.

We see now how we should be. We should be one with God, for the Logos is also the pattern for our lives.

Another way of looking at the Logos is like God’s blueprint for making children. Like DNA perhaps. When he made his children in his image, the image was the Logos. That blueprint was imprinted on our beings at the moment of our creation. We cannot have any true satisfaction in our lives while they are contrary to the blueprint.

While we are out of tune with God’s plan and purpose for our life, we will never know complete peace or joy. Our purpose is to be like Jesus. Our purpose is to be the Logos of God in the flesh in this world.

Jesus purifies us of all the dirt and evil that corrupts us. He washes away all the parts of our life that are not the Logos, and sets us free to be the Logos. He is the Logos.

Before he was Jesus, he was the Logos. One day we shall join him in that place where we are all created to live with God. That perfect city of the new Jerusalem that John tells us about in his book of Revelation.

Logos is not just the word. It is so much more. Understanding this will help us.

The Logos is Jesus. The Logos is God’s perfect plan for you and me. The Logos is the reason why. It is the word which judges the world and saves the world, the word now turned into flesh. Don’t patronize it; don’t reject it; don’t sentimentalize it; learn the language within which it makes sense.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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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신 그 분

요한복음 1:1–18

셀주크(Selçuk)는 터키의 한 도시입니다. 그 도시의 본래의 헬라어 이름은 사도 요한을 기리는 의미에서 Agios Theologos입니다. 요한은 이 곳에서 남쪽으로 2 킬로미터 (1마일) 떨어진 에베소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에베소에서 그는 복음서를 작성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요한이 계시록에서 언급했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의 크리스천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사도라 주장하지만 실제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하였고, 그들이 거짓말 하는 자들임을 발견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에베소에 사는 동안, 그 교회는 거짓 가르침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분쟁 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쓰고 있을 때, 그의 가장 주된 목표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에베소에 있는 어떤 무리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쳐주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있을 당시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너무나 숭배하는 나머지 또 다른 종파가 생길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처럼 도덕성을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놓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세례 요한에 관하여 언급할 때마다, 그는 세례 요한을 낮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세례 요한이 세상의 빛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그 빛을 향해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기적을 베푼 적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부분을 말하자면, 그는 예수님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짊어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 둘째,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죄를 없애실 수 있으십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방향을 제시한다는 그 사실에만 집중을 한 나머지 그 방향의 끝에 누가 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힌두교도들이나 무슬렘들이 그들의 경전들이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문제입니다.

무슬렘의 거룩한 경전인 코란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고 그가 선지자들 중에 유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천국에 가셨고 여전히 그 곳에서 알라와 함께 살아 계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날에 돌아오실 것입니다.

힌두교는 속죄를 위한 완벽한 제사(purusha)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완벽한 희생물이기에 힌두교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필요에 대해 강조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코란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된 독실한 무슬렘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Ali Pektash라는 터키 사람은 자신의 삶이 혼란 가운데 있을 때에 성지 참배를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그의 삶에 명쾌한 답을 얻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에 와 있는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꿈에 두 번이나 나타나셨습니다.

Sadhu Chellappa는 남쪽 인도에 있는 Tamil Nadu에 사는 크리천입니다. 그는 힌두교인으로 자라났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Shlokas를 암송하고 있는데, 베다경에서 언급되는 “Prajapati”(인간들의 주)의 전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인물은 기록에 의하면 세상의 죄를 지고 그것을 위해 죽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죄가 없어야 하고 그의 머리에 야생 가시 덩굴을 쓴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죄로 인해 죽고 부활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Sadhu Chellappa는 Rig Veda에서 “조용히 고통 받는 자”로 언급되는 Prajapati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Prajapati에 대해 조사하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전에 있는 다른 많은 성직자들과 브라만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Prajapati가 누구인지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이는 매우 긴 이야기이고 그는 이 과정에 관한 책도 저술했으며, 결국 Sadhu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중하는 대신 우리는 그 손가락이 어디를 향해 가리키는지 바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복음서에서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믿는 자들, 목사님들과 모든 제자들은 또한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의 복음서가 풀려고 하는 첫번 째 문제는 세례 요한에 관해 지나치게 높은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두번 째 문제는 예수님에 관한 너무 낮은 관점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이는 당시 만연된 일반적인 관점이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두 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것은 –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 어느 한 쪽 영역이 다른 쪽 영역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서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플라토는 영적인 것이 더 실제적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인 것이 더 진정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위의 두 영역을 다 포함하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데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 세속적인 것과 하늘의 신령한 것, 신성과 인성 – 이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바꾸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어떤 면이 진짜인가에 대해 결정지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첫번 째 시도는 예수님께서 신성을 가지시고 단지 인간처럼 보이실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단은 ‘도체티즘(그리스도 가현설)’이라 불리고, 예수님은 단지 혼령이었고 그의 몸은 환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 시도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평범한 인간이었고 단지 그가 하나님과 완벽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누구나 죄가 전혀 없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양자이지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단은 양자론이라 불리고, 여러분들도 가끔 이것에 동의하는 설교는 특정 장소들에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번 째 시도는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영면성을 동시에 조금씩 지니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오늘 날에도 보편화 되어 있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께서 절반만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절반만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들만의 말씀 해석본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말씀이 ‘한’ 하나님(‘a’ God)이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 헬라어 성경에서는 절대로 ‘한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넷째, 이들 이단에 대한 사도 요한의 대답은 예수님께 완벽한 하나님이시자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믿었던 예수님과 동일한 분을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인성을 보여주기 위해, 요한은 예수님께서 친구의 죽음에 슬퍼 우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으며 피곤하고 놀랐던 것을 말해 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진정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어떤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하셨는가를 강조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필요로 하셨고 우리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본 눈의 증거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인간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매우 강조합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요한의 복음서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세 가지 주장을 하며 각각의 주장에는 일곱 개의 요점이 있습니다.

첫번 째 주장은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일곱 명의 사람들의 개인적인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 일곱 명은 세례 요한, 나다나엘, 베드로, 도마, 요한, 그리고 예수님 자신입니다. 유대교 법에서는 오직 세 명의 증인만 있으면 되지만 히브루인들에게 일곱은 완전한 수입니다.

두번 째 주장은 기적입니다. 요한은 일곱 가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특정한 기적들을 골라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5,000명을 먹이신 이야기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과 세 가지의 놀라운 치유를 하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니고데모가 말했듯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만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나는’ 이라는 단어를 일곱 번 되풀이 합니다.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실 때에 ‘나는 천국의 떡(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장님의 눈을 보이게 하실 때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나는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삶을 그 분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Amen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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